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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봉 위원량의 ‘망곡서望哭書’ 암각문, 해발 420m 고지 현장에서 고증 결과를 공개하다
기사입력  2021/03/18 [10:02] 최종편집    김대연 기자

수리봉 위원량의 ‘망곡서望哭書’ 암각문, 해발 420m 고지 현장에서 고증 결과를 공개하다


[KJA뉴스통신] 해동암각문연구회와 장흥문화원이 2020년 11월부터 공동사업으로 추진한 장흥 암각문 조사 가운데, 전남 장흥군 수리봉 위원량의 ‘망곡서’ 암각문은 크게 주목받은 성과물이다.

관심이 지대한 만큼 시비의 논쟁도 있었다.

본 조사단이 처음으로 공개한 영상과 사진임에도 판독에 이견을 제시했다.

이 같은 문제점을 불식시키기 위해 조사단은 지난 3월 13일 현장에서 ‘망곡서’ 탁본을 공개적으로 실시했으며 문헌고증의 결과도 공개했다.

아울러 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의 전화 인터뷰도 가졌다.

이날 현장에는 조사단 외에 회은 위원량 선생의 증손자 3인과 장흥향토사연구가, 장흥위씨종인, 언론 기자 등 10여명이 참여했으며 간략하게 고유제를 올린 다음 탁본을 실시했다.

회은 위원량의 칠언절구를 새긴 암각문은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 내동과 구룡리 자미마을 뒷산 정상인 수리봉 암벽에 북향으로 새겨져 있다.

바위 면에 광곽을 얕게 파고 평탄하게 조성한 다음에 해서체 종서로 쓴 칠언절구 ‘登臨是日感斯’峰ㄷ是東邦守’義峰人多不守’峰能守可以人’兮不似峯’ 28자를 음각했다.

그리고 좌측에 ‘隆熙庚戌秋’ 魏元良謹拜’ 望哭書’라는 관지를 종서로 음각했다.

판곽의 규모는 가로 85㎝, 세로 50㎝이다.

글씨 하나의 크기는 대략 가로 8.5cm×세로 9.5cm 정도이다.

관지의 내용은 “융희 경술년 가을에 위원량이 삼가 절하고 곡하며 쓰다”이다.

융희 경술년은 한일합병이 체결된 1910년이다.

조사단장 홍순석 교수가 공개한 ‘망곡서’ 관련 문헌기록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장흥지속록長興誌續錄, 장흥지長興誌 3건인데, 문헌에는 ‘斯’자가 ‘於’로 ‘多’자가 ‘之’, ‘而’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의 유학자 위원량이 경술국치의 사실을 듣고 울분을 토로하고자 수리봉 정상에 올라와 칠언절구를 짓고 암각문을 조성한 것이다.

칠언절구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登臨是日感斯峰 - 오늘 올라와 이 봉우리에서 느끼나니ㄷ是東邦守義峰 - 이 봉우리야말로 동방의 의를 지킨 봉우리네人多不守峰能守 - 사람 많아도 못 지킨 것을 봉우리는 지키니可以人兮不似峯 - 사람이 이 봉우리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네 조선환여승람에는 회은 위원량의 ‘송암정松巖亭’ 시도 수록되어 있는데, ‘망곡서’와 관련된 중요한 단서이다.

隙地煙霞築一樓 - 안개 노을 빈터에 누정 하나를 지으니 洞門深鎖遠漁洲 - 마을 입구는 굳게 닫혀져 물가에서 멀고有期月滿靑山面 - 달이 푸른 산에 꽉 차기만 기다리는데不種花開老石頭 - 심지 않은 꽃이 오랜 돌 머리에 피었네何必苟求名利得 - 어찌 꼭 구차히 명예와 이득을 구할꼬莫如安分讀書留 - 분수 지켜 독서하며 머무는 것만 못하리於今仰數先天事 - 지금 우러러 지난 일들을 헤아리니 恨未勤王庚戌秋 - 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송암정’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경술년 가을에 근왕하지 못함이 한스럽네”라 한 것은 바로 ‘망곡서’ 암각문이 조성된 경술년 당시를 회상해서 말한 것이다.

이날 2차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 가운데 ‘망곡서’ 암각문이 정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의미가 깊다.

수리봉의 여러 바위 면에서 고종 황제가 있는 북향의 바위 면을 택해 암각문을 조성한 것이다.

그만큼 ‘망곡서’ 암각문은 회은 위원량 선생의 결연한 우국충정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공개한 홍순석 조사단장의 자료와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보면, 수리봉 ‘망곡서’ 암각문은 다음과 같은 사료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필서자 회은 위원량은 문림의향 장흥의 지역 콘텐츠에 부합하는 근대시기의 장흥의 문사이자 의리를 실천한 학자임을 암각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근대시기 중 1905년 을미사변과 1910년 한일합병은 전국 유림의 의병 활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장흥 지역의 문사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연재 송병선이 1905년에 자결하고 1910년 매천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29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 위원량이 수리봉에 통한을 참아내며 암각문을 조성했을 정황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단지 지면에 남긴 시문과는 격이 다르다.

“경술년 가을에 위원량이 삼가 절하고 곡하며 쓴다”는 관지까지 바위에 새긴 것은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조정의 관료들이 사직하거나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며 지은 망배시와는 차원이 다르다.

경술년 전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분개하고 지사들은 순절하며 절명시를 남겼던 시기에 이처럼 완벽한 암각문으로 당시의 정황을 토로한 자료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근대시기 호남 지역의 항일의병 활동 관련 사료로서도 주목될 것이다.

문헌과 증언 자료 외에 ‘망곡서’와 같은 암각문을 통해서 현장의 사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도 이 자료는 의미가 깊다.

회은 위원량의 ‘망곡서’ 암각문은 암각문의 구성 요소인 본문과 관지, 판곽까지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석학 분야에서의 가치도 높다.

회은 위원량의 ‘망곡서’ 관련 언론 방송보도가 되면서 후손으로부터 회은의 초상, 고택, 묘역 관련 사진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장흥위씨 문중의 사적과 연관된 관심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회은 선생 관련 자료는 향후 방촌유물전시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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