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복무요원이 시각장애인 공무원에게 건넨 빛 |
[KJA뉴스통신] 벽/교통지도과/교통행정과-자동차창구/벽/중앙홀/복도/안내창구. 누군가에겐 암호처럼 보이는 회계 처리 프로그램 ‘엑셀’ 파일 상의 단어 나열이, 다른 누군가에겐 눈이고 빛이다.
“1층 중앙홀에서 왼쪽으로 들어가 교통행정과를 지나면 나옵니다” 시각장애인인 광산구 공무원 박성진 주무관은, 교통지도과 위치를 묻는 민원인의 물음에 능숙한 설명으로 응대했다.
다 이 단어 나열 문서 덕분이다.
출퇴근으로 3층 사무실에 들고날 때도, 업무 차 다른 부서를 방문할 때도 이 문서는 요긴했다.
이젠 광산구청 지하 1층부터 8층 옥상까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을 정도다.
지난해 11월까지 박 주무관은 답답했다.
구청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워서다.
구 홈페이지에 있는 구 청사 안내도와 문서는 참조용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시각장애인 스틱과 몸으로 더듬으며 부서와 시설물의 위치를 파악해놓으면, 6개월 단위로 진행되는 인사·부서 이동은 쓰나미처럼 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같은 부서에서 대체복무로 행정사무를 보조하던 이준혁 사회복무요원은 이런 사정이 안타까웠다.
돕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닿았을까. 이 요원에게 간단한 알고리즘 하나가 떠올랐다.
대학에서 전공하며 배운 컴퓨터와 프로그램의 원리, 박 주무관의 업무를 보조하며 알게 된 시각장애인용 컴퓨터의 특성을 고려하면 뭔가 박 주무관을 도울 방안이 나올 것 같았다.
마우스 없이 방향키와 음성 메시지로 구청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문서는, 그렇게 탄생했다.
12월 완성된 ‘광산구청 텍스트 안내도’ 문서는 모두 9장으로 구성돼있고 구청 각 층이 단면도처럼 담겨있다.
박 주무관이 처음 이 문서를 열었을 때, 헤드폰으로 ‘중앙홀’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왼쪽 방향키를 누르자 ‘벽’이라는 말이, 반대 방향키를 누르자 다시 ‘중앙홀’이라는 메시지가 들렸다.
문서는 간단했지만 실용적이었다.
더딘 속도였지만 구청 전체 구조는 컴퓨터 방향키의 움직임과 함께 박 주무관의 머릿속에 하나씩 그림처럼 입력됐다.
이제 부서이동이 있으면 몇 칸의 단어만 새로 고쳐 입력하면 된다.
평소에도 이 요원은 박 주무관의 눈이 돼줬다.
점심 시간 구내식당에서 배식을 도와 같이 식사하며 말동무를 해주고 이동할 때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광산구 블로그를 담당했던 박 주무관에게 사진과 영상 같은 시각 이미지를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준 것도 그였다.
얼마 전 근무부서를 옮긴 박 주무관은 “공직 첫 근무지에서 준혁 씨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며 “그의 도움은 단순한 선행을 넘어 시각장애인인 내가 공직사회에 적응하고 맡은 바 소임 다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이 요원은 5월 소집해제를 앞두고 있다.
그의 행정보조를 받은 광산구 홍보실 직원들도 ‘이런 사회복무요원은 더 없을 것이다’며 벌써부터 빈자리를 걱정할 정도다.
이 요원은 “소집해제 뒤 중단한 학업을 마치고 4차산업혁명기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이 요원이 만든 문서는 기술적인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 문서에 담긴 배려의 마음만은 그 어떤 첨단기술도 도달할 수 없는 울림으로 남지 않을까. 이 요원이 만들어낼 4차산업혁명기술이 기대되는 이유다.